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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9. 9世 〉1. <요재공>통훈대부비안현감현주조공팽손사단비문(通訓大夫比安縣監玄洲趙公彭孫祀壇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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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정공>통훈대부내자시판관전노성현감공휘순묘비음기(通訓大夫内資寺判官前魯城縣監公諱珣墓碑陰記)
通訓大夫内資寺判官前魯城縣監公諱珣墓碑陰記 嘉靖二十四年乙巳十月十二日辛丑内資寺判官趙公以病終于第春秋七十有七計聞親朋爭奔走吊賻是年十二月二十日己酉葬于本府治西梧里峴之原禮也公諱珣字德章籍貫全羅道淳昌郡曾祖前副正諱瑜祖 贈吏曹參議諱斯文考 贈户曹參判諱智崗妣姜氏籍晋陽平章郡事一遇女 贈封貞夫人乃因其同生弟府尹琛所追恩也成化己丑二月壬辰公生資禀秀異年纔二八武藝邁倫弘治己未春參都試一等除兼司僕丁卯擢丙科第同年冬丁父憂服関庚午夏邊警甚急至陷本道沿海數城其時巡邊使鄭光弼以公將才卓越馳啓于朝特除突山浦萬戶未幾以從妹婿兵使申繼宗相遯俄轉平山浦萬户壬申遷授軍職癸酉拜宣傳官丙子丁母憂服関拜訓鍊院習讀官己卯陞中部將壬午轉都摠府都事癸未遷司甕院主簿既而出監魯城縣輕徭薄賦民服善政每考居上特賜賞加戊子遷内贍寺主簿己丑超拜司僕寺判官不月以前治民績又拜清州判官甲午遷内資寺判官見忤權奸歸于鄉鄉即昇平府富有縣也居家嚴肅斬斬成範對人言笑不苟凛然有不可犯之色公凡再娶先盧氏籍宣城郡府使效愼之女無育而逝後沈氏籍靑松府族親衛安智之女生一男曰光貞娶金忠義千寶之女生三男二女皆幼折末男嗣宗光貞亦不幸年未三十早逝人皆惜之余小子於公情深恩厚有同己親非若凡爲子弟者比敢不爲之叙姑記公平昔之事如此云爾 통훈대부내자시판관전노성현감공휘순묘비음기(通訓大夫内資寺判官前魯城縣監公諱瑜墓碑陰記) 가정 二十四년(一五四五) 을사 十월 十二일 신축에 내자시판관 조공이 병으로 집에서 졸하니, 춘추는 七十七세이다. 부음이 알려지자 친척과 벗들이 달려와 조문하고, 이 해 十二월 二十일 기유에 본부(本府) 서쪽 오리현(梧里峴) 언덕에 장례하였다. 공의 휘는 순(珣)이요, 자는 덕장(德章), 본관은 전라도 순창군이다. 증조는 전부정 휘 유(瑜)요, 조는 증이조참의 사문(斯文)이요, 고는 증호조참판 휘 지강(智崗)이며 비 강 씨(姜氏)는 본관이 진양(晋陽)으로 평장군사(平章郡事) 일우(一遇)의 딸인데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으니, 이는 공의 동생 부윤(府尹) 침(琛)의 추은(追因心) 때문이다. 성화 기축년(一四六九) 二월 임진에 공을 낳는데 자품이 뛰어나 나이 겨우 十六세에 무예(武藝)가 절륜하였고, 홍치(弘治) 기미년(一四九九) 봄에 도시(都試)에 참여하여 一등으로 합격하니, 겸사복(兼司僕)을 제수하였다. 정묘년에 병화(丙科)에 합격하였는데 그해 겨울, 부친상을 당하였다. 복을 벗고 경오년 여름에는 변방이 매우 소란스러워서 본도의 바닷가 몇 개 성(城)이 함락되기까지 하였다. 그때 순변사(巡邊使) 정광필(鄭光弼)이 공의 장재가 탁월함을 보고 조정에 알리니 돌산포 만호(突山浦萬戶)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얼마 후에는 종매서(從媒婿) 병사(兵使) 신계종(申繼宗)과 상피(相遯) 때문에 평산포만호(平山浦萬戶)로 옮겼다. 임신년에는 군직(軍職)으로 옮겨 제수받고, 계유년에는 선전관(宣傳官)을 배수하였다. 병자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복을 벗고는 훈련원 습독관(習讀官)에 임명되었다. 기묘년에는 중부장(中部將)으로 승진하고, 임오년에는 도총부도사(都摠府府都事)로 옮겼으며 계미년에는 사옹원 주부(司甕院主簿)로 옮겼다. 얼마 후에는 노성현감(魯城縣監)으로 나가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하니, 백성들이 그 선정에 복종하여 치적 고과(考課)에서 매양상(上)을 받아 포상을 내렸다. 무자년에는 내섬시 주부(内贍寺主簿)가 되고, 기축년에는 사복시 판관으로 뛰어 배수되었는데 한 달이 되지 않아 노성현을 다스리던 치적이 인정되어 다시 청주 판관(清州 判官)이 되었다. 갑오년에는 내자시 판관으로 옮겼는데 권세 있는 간신의 미움을 받아 귀향하였으니, 고향은 바로 승평부 부유현(富有縣)이다. 집에 있으면서는 매사에 모범을 보였고, 남을 대하여 말하고 웃는데 구차한 빛이 없고 늠름한 모습이 감히 범하지 못할 위엄이 있었다. 공은 재취하였는데 전 부인 선성 노 씨(宣城盧氏)는 군의 부사(府使) 효신(考愼)의 딸로 아들을 기르지 못하고 졸하였고, 후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부의 족친위(族親衛) 안지(安智)의 딸인데 아들 광정(光貞)을 낳았다. 광정은 충의위(忠義衛) 김천보(金千寶)의 딸에게 장가들어 낳은 三남 중에 二남은 다 어려서 죽고, 끝으로 사종(嗣宗)이 남았다. 광정 역시 불행하게 三十세에 요절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나 소자(小子)는 공에게 두터운 정과 후한 은혜를 입어 친부모와 같아 다른 사람들의 자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에 감히 새로 쓰지 못하고 공께서 평소에 써놓은 글에 따라 이상과 같이 쓴다. 종자(從子)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효정(孝貞)은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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